#1 Smile Again

대전시티즌의 간판 미드필더인 그가 올스타 상을 받던 날, 트로피를 안고 지어보인 웃음은 누가 봐도 백만불짜리였다. 언론에서 보도하는 귀공자풍의 외모라던가, 미드필더로서 발군의 순발력과 판단력을 가졌다던가 하는 수식어보다는 나는 그의 환한 웃음에 덜컥 마음이 아려왔다. 수상하기 직전에 '네가 올스타상을 타게 될 거야'라는 귀띔을 들었을 테니 퍼포먼스에 대한 준비를 할 수도 있었으련만 "너무 좋은데요?"라는 듯 씩 웃는 표정에서 그의 가슴속에 일렁였을 감동을 눈치챌 수 있었다. 대중적이라는 것은 대중이 받아들이고 좋아할 정도가 될 때까지 욕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축구의 대중화에는 그러한 쓴소리와 채찍들이 수도 없이 이어졌었다. 더욱이 최근 몇 년 동안 유독 영욕이 엇갈려온 한국 축구계에 몸담으면서 매순간 탄력적으로 시간을 견딘다는 것은 공자님이나 할 수 있는 고행이다. 잦은 부상으로 인한 재활치료 기간 동안 그라운드에 설 수 있을까,라는 자문은 축구선수로서는 죽음과도 같은 공포였을 것이다. 그 상은 '축구를 잘하는' 이 아니라 '모두가 공감하는 축구를 한' 선수에게 주는 상이었다. 그보다 더 가슴 벅찬 영광의 순간과 그보다 더 뻑적지근한 상을 받기도 했겠지만 그날은 축구선수 이관우에게 있어 인고의 시간을 보내온 개인에 대한 보상과 운동선수로서의 평가를 한꺼번에 떨친 날이었다. 그런 이관우에게 팬들은 일찌감치 축구계의 가장 밝은 별, 시리우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2 Rain Drops on His Shoulder

촬영 전날 저녁, 대전에 도착한 스태프들을 그는 반가운 악수로 맞았다. 축구선수로서는 작은 키,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 특이하게 다갈색의 깊은 눈빛이 인상적인 이 남자. 운동만 해온 스물여섯 청년치고는 낯가림도 없는 편이었으며 꽤 쓸만한 유머감각을 갖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전국에 비'라는 일기예보를 믿지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일기예보를 믿기란 어렵다. 그렇지 않은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촬영을 위한 세팅이 막 시작됐을 때 이래도 안 믿겠냐는 듯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비가 와서 걱정이네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군요', '촬영, 괜찮으시겠어요?', '카메라 안 젖어요?' 라는 립서비스용 질문들을 했다면 쉬는 시간에 그를 불러낸 데 대해 이쪽에서도 미안해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구단에 소속된 몸이었고 다같이 모여서 먹어야만 하는 선수들의 식사시간이 코앞이었다!) 하지만 그는 느긋하게 스태프들을 기다려주었고 이것저것 붙임성있는 대화를 먼저 시도했다. 웬일인지 두어번 진행해본 팀처럼 죽이 척척 맞아주어, 우리는 싱겁거나 유쾌했던 농담따먹기를 해가며 우중에 진행된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3 The Cup of Life

청소년대표, 올림픽대표, 국가대표를 거치면서 그는 거만해 있었다고 했다.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무서운 게 없었죠. 그때만 해도 한참 어릴 때였는데 언론에서 잘한다 잘한다 띄워놓으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뛴거죠. 근데 큰 수술을 여러번 하면서 사람이 됐어요. 하하. 내가 해야 하는 건 축군데, 거만하다는 비난을 받으며 잘난척해온 스스로가 한심했어요. 다쳤을 땐 운동장에 서는 것조차 힘들었거든요.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그라운드에 서게 되고, 그러다보니 나보다 남을 더 배려하게 되더라구요." 그랬었나? 그가 거만하다는 비난을 받았었나,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나이에 겪었을 당혹스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던 그에게 지금 쏟아지는 주목과 찬사는 철없는 이관우에서, 질적 팽창에 성공한 청년 이관우에겐 덤덤한 일이다. 이제 그는 운동선수에게 그보다 더 좋은 게 없다는 산삼을 공수해주는 후원자도 있고, 그라운드에서 그의 활약에 울고 웃는 든든한 팬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기며 명성이며 다 부질없이 축구만이 인생이라고 생각해버리는 단호한 자기확신을 가진 지 오래다. 감정의 기복이 그다지 크지 않으면서도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정표현이 전부 들어있는, 돌려서 말할 줄 모르고 입에 발린 말 잘 못하는 그는 천상 축구밖에 모르는 남자였다.



#4 as a Sportsman

그라운드에 들어설 땐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믿는다. 작년 이맘때 첫경기가 세상에서 제일로 떨렸노라고 그는 회상했다. "내가 수술하기 전의 몸 상태로 플레이할 수 있을까?싶어서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다행히 주위에서 잘 봐줬고, 녹슬지 않았구나,라는 말을 들었을 땐 갑자기 자신감이 확 붙었어요. 당시에는 '전보다 못 미친다'는 말만은 안 듣고 싶었는데 아직까지 그런 얘기는 못 들었으니 다행이죠." 그를 믿는 관중들과 스스로를 믿는 선수 자신이 그라운드에서 한 호흡이 되는 것처럼 '죽이는' 순간이 없단다. "미드필더는 공을 넣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고 그 도움을 받아서 스트라이커가 골을 넣으면 환상이죠. 그게 가장 안정적인 구도예요. 어렸을 땐 '아, 저거 내가 넣을 수 있는데...'라는 골 욕심이 무지 많았어요. 은중이는 그런 면에서 좋은 파트너였죠. 3,4년씩 같이 있으면서 눈빛만 봐도 어떻게 할 건지 알게 되는 거 있잖아요. 지난 상무전 때 1대 1로 비기긴 했지만, 거의 확실하게 골로 연결될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거든요. 근데 내가 찬 공을 은중이가 못 넣었죠. 그때 은중이랑 나랑 그 넓은 그라운드에서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녀석이 아주 시퍼렇게 질려서는 '형, 미안해'라고 말하더라구요, 은중이 눈이. 나는 녀석의 그런 면이 좋아요. 그리고 우리는 그만큼 형제 같은 파트너였어요. 지금은 은중이가 일본에 가고 없으니 책임감이 두배가 됐죠. 은중이가 있을 때보다 못하면 안되니까."



#5 The World is not Enough!

당연히! 그의 목표는 유럽 진출이다. 3개월이 지나면 대전시티즌과의 계약이 풀리는 이른바 '자유계약선수'가 된다. 계약의 내용에 따라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얘기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을 안 받게 되었다는 그는 돈에 대해 남들보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고를 갖고 있었다. 있으면 좋은 거고, 없으면 실력껏 필요한 만큼 벌면 되는 것. 이미 그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머릿속에 그려두었다. 평범한 가정을 만든 다음,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선수(테크니션을 말한단다)들을 모아서 그만의 팀을 꾸리고 싶단다.

에디터 안은영 / 사진 Frank J.Lee / 스타일리스트 서경희 / 헤어&메이크업 성지안
FIGARO girl 2003.10